[심형권 목사] 예레미야 22:20-30절 묵상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역사와 섭리가 없다면 우리의 구원도 없습니다.

본문
오늘 본문 후반부인 24-30절은 살룸(여호아하스, 10-12절)과 여호야김(13-19절)에 이어 여호야김의 아들 ‘고니야’에 대한 심판의 메시지입니다. ‘고니야’는 여호야긴의 다른 이름이고, 24장에서는 ‘여고냐’, 27장에서는 ‘여고니야’로 나옵니다.
여호야긴에 대한 심판이 선언되기 전에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향해 이렇게 명하십니다: ‘너는 레바논에 올라 외치며 바산에서 네 소리를 높이며 아바림에서 외치라 이는 너를 사랑하는 자가 다 멸망하였음이라’(20절). 레바논, 바산, 아바림은 모두 이스라엘 영토의 경계에 있는 산들입니다. 그러니까 예루살렘의 바깥에 있는 높은 산지에 올라가서 객관적으로 너희의 상태를 살펴보라는 뜻입니다.
안에 있으면 자기 객관화가 안 되고 자신을 제대로 볼 수가 없습니다. 멀리 떨어져 자신을 잘 볼 수 있는 높은 곳에서 너의 지금 형편을 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야 하는 이유는 ‘너를 사랑하는 자가 다 멸망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너를 사랑하는 자’는 문법적으로 ‘네가 사랑하는 자’로 읽는 것이 더 자연스럽습니다. 예루살렘, 네가 하나님 대신 의지하고 사랑했던 자들(복수형)이 다 멸망했으니 더 이상 의지할 자가 없다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외치라’는 말은 ‘선포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 단어는 고통과 회환으로 인한 신음소리를 의미하는 단어로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더 이상 붙잡을 지푸라기 조차 없어 절망하고 한탄하는 소리입니다. 그 소리는 마치 23절에 ‘여인의 해산하는 고통 같은 고통’의 소리와 같습니다. 해산의 고통은 하와에게 내려졌던 에덴 동산에서의 처음 범죄를 떠 올리게 하고, 남유다의 죄악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를 보여줍니다.
남유다는 평안할 때는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습관처럼 불순종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악 때문에 수치와 욕을 당할 것’(22절)입니다.
당장 아무 일도 없다고 괜찮은 것이 아닙니다. 로마서 2:4-5절의 말씀대로,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어울리지 않는 습관 있지 않은지요? 자신도 모르게 그냥 삶의 일부가 되어 습관처럼 되어버린 가치관, 행동이 남아 있지는 않는지요? 불순종이 습관이 되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이어지는 24-30절은 여호야긴 왕의 실패 이야기입니다. 계속 왕의 실패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 나가는 것은 백성들의 실패는 왕의 실패이기 때문이고, 왕의 실패는 이제 궁극적으로 온전한 다윗 왕조의 메시야를 기다리게 하는 장치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야긴/고니야는 하나님의 오른손의 인장반지와 같은 지위를 누렸지만(24절), 이제 천하고 깨진 그릇과 같은 신세가 됩니다(28절). 하나님께서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한다’(24절)고 하셨고, 29절에서는 ‘땅이여! 땅이여! 땅이여!’ 세 번이나 땅을 부르면서 땅을 증인으로 소환하십니다. 반드시 이루시겠다는 강력한 맹세의 표현입니다. ‘어머니와 함께 바벨론 땅으로 잡혀가 거기서 죽을 것이고’(26절), ‘자식이 없이 평생 동안 형통하지 못하고 그의 자손 중에 다윗의 왕위에 앉아 유다를 다스릴 사람이 다시는 없을 것’(30절)입니다.
실제로 여호야긴은 바벨론의 2차 침공 때 그의 어머니 느후스다와 함께 포로로 잡혀가 다시 돌아오지 못하고 거기에서 죽었습니다. 그런데 자식이 없을 것이라는 말씀과는 달리 그에게는 일곱 아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자손이 왕위에 오르지는 못했으니 계보의 관점에서는 없는 것이나 다름이 없고, 또 ‘없다’는 히브리어 단어는 ‘벌거벗기다’는 뜻으로, 그의 자식들의 왕의 후계자로서 모든 영예를 박탈했다는 의미로 우리는 이해합니다.
여호야긴의 일곱 아들 가운데 장자 스알디엘과 장손 스룹바벨은 후에 고국으로 돌아와 제2성전을 건축했고, 여호야긴은 바벨론에서 석방되어 왕의 식탁에 앉는 호사를 누렸지만(52:31; 열왕기하 25:27절)그것을 형통했다고 보기는 힘들 것입니다. 오히려 다윗 왕조의 씨를 포기하지 않으신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보게 됩니다. 결국 그 계보를 통해 예수님께서 오시기 때문입니다(마태복음 1:11-12절). 여호야긴이 선택된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 외에는 설명이 안 됩니다. 패역한 왕들의 행보 가운데도 하나님은 회복의 씨를 바벨론에서 남겨 두셨습니다. 죽음이라는 절망의 현실 가운데, 소망이 없어 보이는 저주의 선포 가운데, 그리스도 예수께서 오실 길이 준비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역사와 섭리가 없다면 우리의 구원도 없습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 앞에서 패역한 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부르시고 믿음 주시고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합시다. 덧없이 사라질 것들에 너무 마음 주지 말고, 오늘도 이 은혜가 일하게 하고, 이 은혜가 삶의 이유이고 원동력이 되는 삶이 되게 합시다. 오늘도 저를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마라나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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