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22:1-9절 묵상 > 말씀 묵상

본문 바로가기

말씀 묵상

[심형권 목사] 예레미야 22:1-9절 묵상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아시고, 우리의 속셈을 꿰뚫고 계십니다

본문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는 구절은 선지서에 전반적으로 나타나고, 오늘 본문에도 여러 번 나타납니다. 성경은 선지자의 개인 철학이나, 그의 경험에서 나온 지혜를 전하는 책이 아닙니다. 자기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계시를 담은 ‘하나님의 말씀’의 책입니다. 이 땅의 말씀의 사역자들이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만을 전하고, 그 말씀대로 행하기를 기도합니다.  

 

앞의 21장에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시드기야 왕이 보낸 사람들을 통해 ‘혹시 여호와께서 우리를 도우셔서 바벨론이 떠나게 하라’는 기도 요청을 받았지만, 하나님의 뜻은 남유다의 멸망임을 분명하게 선언했습니다. 오늘 본문도 대동소이한 심판의 메시지의 내용입니다.

 

잘하고 있는데 심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돌아오지 않고 있고, 또 끝까지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아셨기 때문에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혹시’(21:2절)라는 말 속에 위기의 상황에서 뭐라고 붙잡고 싶은 시드기야 왕의 애매한 태도가 읽혀집니다. 예레미야의 메시지를 부인하고 핍박했던 시드기야의 입장에서는 그럴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예레미야를 찾은 그의 용기(?)가 가소롭습니다.

 

기도만 한다고 응답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는데 기도 소리가 올라갈 리가 없습니다. 죄악을 안고, 순종의 마음도 없이, 자신의 욕심을 가지고 드리는 기도는 공허한 메아리일 뿐입니다. 하나님을 자신의 꿈과 소망을 이루는 도구로만 생각한다면, 그것은 엄청난 착각입니다.

 

그래서 앞의 20장 12절에서 예레미야는 하나님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의인을 시험하사 그 폐부와 심장을 보시는 만군의 여호와여!’ 우리의 동기와 중심의 생각을 우리 하나님은 알고 계십니다. 따라서 거짓 경건에 속지 않으십니다.

 

사도 바울은 이 진리를 갈라디아 6장7절 이하에서 잘 가르쳐 줍니다. 그것은 육체를 위하여 심으면 육체 대로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으면 영생을 거둔다는 ‘심는 대로 거두는 법칙’입니다. 그런데 육체를 위해 심으면서 영적 은혜와 영생을 기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영생을 얻기를 원한다면 성령을 위하여 참 믿음의 씨앗을 심어야 합니다.  

 

예수님도 산상수훈에서 바리새인들의 외식하는 기도에 대해 말씀하실 때,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회당과 길거리에서 기도하기를 좋아했던 바리새인들에게 ‘너희들은 이미 자기 상을 받았다’고 단언하셨습니다. 사람들에게 ‘나는 기도하는 사람이다’하는 인상을 심어 주고 그 칭찬을 목적으로 회당과 길거리에서 기도한 것인데, 사람들이 기도하는 너를 보았으므로 그 기도의 목적은 이루어진 것이고, 따라서 그 기도는 지불 완료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고로 하나님으로부터 상을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골방에서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은밀한 중에 계시는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아시고, 우리의 속셈을 꿰뚫고 계십니다. 그러니 시드기야의 기도 부탁이 응답될 리가 없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의 거절은 하나님께서 너의 속을 알고 계신다는 선명한 증거였습니다.

 

3-4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정의와 공의를 행하여 탈취 당한 자를 압박하는 자의 손에서 건지고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거나 학대하지 말며 이 곳에서 무죄한 피를 흘리지 말라 참으로 이를 준행하면 다윗 왕조를 이을 왕들과 신하들과 백성들이 병거와 말을 타고 이 집 문으로 들어오게 되리라.’

 

‘정의’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판결’, ‘재판’을 의미하는 단어로 올바르고 공명정대한 판단을 말합니다. ‘공의’는 인격체 사이에서 정상적인 관계의 상태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즉, 서로 간의 거짓말, 속임수, 억압, 착취, 이런 것들이 없는 관계입니다. 따라서 공의를 행한다는 말은 남을 속이지 않고, 올바른 관계로 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정의와 공의를 멀리하고, 약자들을 압제하고 학대하면서 기도의 응답을 바라느냐고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어떠합니까? 참을 수 없는 가벼운 기도는 아니던가요? 상황만 벗어나려는 얄팍한 속임수는 아니었는지, 정말 하나님의 뜻에 순응하는 기도였는지요?

 

‘우리의 기도는 하늘 보좌를 움직인다’는 말이 전혀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 말은 초점이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마음보다 기도하는 우리의 열심과 의지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보좌가 우리의 기도를 움직이는 기도!’이어야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알아가는 은혜의 방편입니다.

 

자신의 안위를 생각하고 기도를 요청했던 시드기야가 예레미야를 통해 전해진 말씀을 듣고 돌이켰더라면 어땠을까 생각해 봅니다. 금식을 선포하고 회개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바벨론을 받아들였더라면 어땠을까요? 하지만 가롯유다처럼 그는 자기의 길을 갔고 그 마지막은 패망이었습니다. 마지막까지 주어진 기회를 놓친 것입니다.

 

죄악의 유혹을 이기고, 세상의 방법을 내려놓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응답을 기대합시다. 한 걸음, 한 걸음 선하신 뜻을 따라 인도하시는 도우심을 겸손하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구합시다. 오늘도 골방의 기도, 응답 받는 기도, 순종의 삶을 배워가는 이 땅의 나그네 여정 길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마라나타!!

0
로그인 후 추천 또는 비추천하실 수 있습니다.

댓글목록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게시판 전체검색
다크모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