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형권 목사] 민수기 7:1-11절 묵상
하나님이 정하신 대로, 명하신 대로 순종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본문
7장부터 9장까지는 앞의 1-6장의 사건보다 시기적으로 앞에 있었던 성막 건축을 끝냈을 때의 일(출애굽기 40:17절)입니다. 시간의 순서대로 기록하지 않은 것은 민수기가 단순한 역사 기록이 아니라 신학적인 의도를 가지고 서술한 책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전쟁을 위한 군인의 수를 계수하고 군대의 진과 행군의 순서를 정하면서(1-2장) 레위 지파의 수는 따로 계수하여 그들에게 성막의 일을 맡기셨고, 이스라엘의 여정의 중심에 성막을 두게 하셨습니다(3-4장). 이는 이스라엘 광야 여정의 성공 여부는 군대의 수와 크기가 아니라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보여줍니다.
부정한 사람은 진영 밖으로 내보내고 죄값은 반드시 치르게 함으로써 공동체의 거룩을 강조했고, 부정함과 죄를 판단함에 있어 억울한 사람이 없도록 공정한 판결이 있어야 함을 경계하셨습니다(5장).
하나님 앞에서의 거룩이 이스라엘의 대표로 선택된 레위 지파의 성막 사역에 달려있지만, 그렇다고 레위 지파에게만 거룩이 요구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레위 지파의 성막 사역에 직접 참여할 수는 없어도 레위 지파처럼 자신을 하나님께 구별하여 드리기를 원하는 사람은 남녀를 막론하고 일정 기간 동안 ‘나실인 서원’을 할 수 있었습니다(6장).
이 모든 것은 우리를 옥죄고 힘들게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과 은혜와 평강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아론과 제사장들은 이스라엘 자손들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라.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6:23-26절).
하나님의 이 마음을 알고 이제 새 마음으로 출발하면 될 것 같은데, 이야기는 다시 성막을 완성했던 과거의 시점으로 돌아갑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것, 어떤 순간에도 잊지 않고 기억해야 하는 것, 이스라엘의 존재 의미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성막에 있음이 강조되는 것입니다.
1절과 10절은 성막이 세워졌던 그 날을 성막의 모든 기물에 ‘기름을 발라 거룩하게 구별한 날’이라고 소개합니다. 기름을 바름으로써 비로서 그 ‘천막’이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성막’으로 구별되었다는 뜻입니다.
기름 부음은 붓기 전과 부은 후의 상태를 구별해 줍니다. 기름 부음을 받은 기물은 받기 전의 기물과 구별되기에 ‘거룩’합니다. ‘거룩’은 어떤 ‘행위’를 묘사하는 용어가 아니라 ‘상태’를 묘사하는 용어입니다. 우리가 성도인 것은 어떤 의로운 행위 때문이 아니라, 우리 안에 성령이 부어졌기 때문입니다. 구약에서 ‘성도’는 ‘경건한 자들’을 뜻하는 ‘하시딤’입니다. 그런데 ‘하시딤’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뜻하는 ‘헤세드’와 같은 어원에서 온 말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그 안에 하나님의 은총으로 가득 찬 사람들’입니다. 의로운 행위를 했기 때문에 성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헤세드 사랑이 그 안에 있는 사람,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부어진 사람이 성도인 것입니다. 따라서 참 성도는 이전의 상태와 이후의 상태가 분명하게 구별되는 자들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성막을 그 중심에 둔 무리, 즉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진 열 두 지파의 지휘관 열 두 사람이 하나님께 ‘헌물’을 드리는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헌물을 드려야 하는 이유를 이스라엘이 ‘계수함을 받았기 때문’(2절)입니다. 계수함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소유로 받아들여 졌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감사는 너무도 당연한 것입니다. 섬김과 헌신은 은혜에 대한 당연하고 자연스런 감사의 표현이지 남과의 비교나 판단의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은혜가 헌신과 섬김의 이유가 되는 사람들, 그들이 성도이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 당 수레 하나, 한 사람 당 소 한 마리씩 드려 총 수레 여섯 대, 소 열 두 마리가 봉헌됩니다. 이 중에 수레 네 대와 소 네 마리는 성막 덮개와 휘장 등을 책임 진 게르손 자손들에게 갔고, 수레 네 대와 소 여덟 마리는 성막의 널판과 기둥 등을 책임 진 므라리 자손들에게 주어졌습니다. 더 무거운 짐을 담당해야 하는 므라리 자손들에게 더 많은 수레와 소들이 주어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법궤를 옮기는 고핫 자손들에게는 아무 것도 주어지지 않았는데 언약궤는 반드시 어깨에 메어 옮겨야 했기 때문입니다. 언약궤의 무게는 대략 85 kg 정도로 성인 네 명이 메기에 무겁다고 보기는 힘들겠지요. 그래도 수레가 있다면 더 편하지 않았을까요? 편했겠지요. 당연합니다.
그런데 이런 질문이 의미가 없다는 것을 빨리 깨닫는 것이 좋습니다. 사실 하나님이 맡기신 일에는 우리의 생각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대로, 명하신 대로 순종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부르심의 분량이 다르고 주어지는 역할과 사명도 다르기에 맡기시는 분량과 상황도 다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지혜 안에서 필요한 만큼 주어지고 나누어 집니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함이 없다’(로마서 11:29절)는 바울 사도의 고백은 진리입니다. 그저 감사함으로 받고 순종하면 됩니다. 그 길이 최선의 길이고, 가장 좋은 길이라는 사실을 믿기 때문입니다.
나를 부르신 그 자리, 나의 사명의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후회 없는 ‘성도’의 삶을 살아갈 것을 ‘서원’합니다.
마라나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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