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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묵상

[심형권 목사] 마태복음 9:1-13절 묵상

능력은 믿는 자만이 경험할 수 있는 은혜입니다.

본문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고치시고(1-8절), 세리 마태(9-13절)를 부르시는 내용입니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도 이 두 사건이 연이어 기록되어 있는데, 어제 본문이었던 8:23-34절에 나오는 풍랑을 잔잔하게 하시고 가다라 지방의 귀신들인 자들을 고치신 사건보다 초기의 행하신 일로 나타납니다. 마태복음이 연대기적으로 예수님의 사역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신학적 의도를 가지고 기록된 것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초기의 사건을 지금 언급하고 있는 마태복음의 의도를 잘 따라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은 많은 이적들을 행하셨습니다. 나병환자를 고치시고 백부장의 중풍병을 낫게 하셨습니다.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떠나가게 하시고 귀신들을 쫓아 내셨으며, 심지어 풍랑까지도 잠잠하게 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이 모든 이적들이 단순히 ‘기적을 위한 기적’이 아니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드러내십니다. 이 모든 치유의 역사들은 예수님께서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는’(6절) 구원자이신 것을 보이시는 ‘표적’인 것입니다.

 

침상에 누운 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예수님께 데리고 옵니다. 마가복음에는 그 사람들이 네 명이라고 하고, 또 데리고 오는 과정을 상세히 보도하지만, 마태복음은 ‘사람들이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데리고 왔다’고만 기록합니다. 그들의 행동보다 죄를 사하시는 예수님의 권능에 더 초점을 맞추려는 본문의 의도를 읽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다’고 선언하셨습니다(2절). ‘믿음으로 죄 사함을 얻는다’는 성경 전체의 가르침에 비추어 볼 때, 친구들의 믿음으로 중풍병자가 죄 사함을 받았다고 볼 수 없습니다. ‘그들’에는 중풍병자도 포함될 것입니다.

 

질병은 아담의 범죄 이후 이 세상이 죄와 사망의 권세 아래 놓여 있음을 보여주는 생생한 증거입니다.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신 것은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우리를 자유하게 하시는 분이심을 보이시는 ‘표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찾은 이 사람들도 단순히 예수께서 병만 고치는 분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오랫동안 기다려 왔던 다윗의 자손, 그 메시아라는 사실을 믿었기 때문에 온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메시아’라면 병도 고치실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을 믿었고, 예수님은 그들의 그 믿음을 보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를 고치심을 통해 자신이 ‘그 메시아’이심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2절).

 

그런데 예수님의 이 죄 사함의 선언이 처음으로 유대 지도자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합니다. 죄를 사하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 한 분뿐으로 알고 있던 그들에게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었고, ‘네 죄 사함을 받았다’는 예수님의 선언은 분명 ‘신성모독’(4절)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믿음’의 길이 갈립니다. 지금까지 행하셨던 예수님의 ‘표적’들을 이들도 들었고 보았을 것입니다. 중풍병자와 친구들은 그 표적들과 말씀(산상수훈)을 통해 예수님을 믿었지만, 이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신성모독으로 느낄 만큼 닫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능통한 ‘서기관들’(3절)이지만 그 성경이 증언해 온 ‘그 메시아’를 믿지 못했습니다. 머리로 말씀을 아는 것과 가슴으로 아는 것은 다릅니다. 다른 정도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생과 영벌을 결정하는 중요한 잣대가 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 ‘네 죄 사함을 받았다’는 말과 ‘일어나 걸으라’는 말 중에 어느 것이 더 쉬울까요? (5절).

 

현실적으로 보면, 일어나 걸으라는 말이 더 어렵습니다. 죄 사함을 받으라는 말은 밖으로 그 결과를 알 수 없지만, ‘일어나 걸으라’는 말은 당장 그 결과를 보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유대인의 입장에서 보면 ‘네 죄 사함을 받았다’는 말이 결코 쉬운 말이 아닙니다. 그 말은 하나님 만이 하실 수 있는 말이고, 속죄의 제사 후에 제사장들을 통해서 선언될 수 있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두 가지 말 그 어떤 말도 당시의 상황에서는 쉬운 말이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어려운 두 가지의 말씀을 다 하셨고, 그 어려운 일을 다 이루셨습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다’고 하심으로 자신의 신적인 권위를 드러내셨고, 또 ‘일어나 걸으라’는 그의 말씀 대로 그 중풍병자를 일으키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의 권세를 쫓아내시는 ‘그 메시아’이시고, 예수님의 구원은 허황된 말장난이 아니라 실재로 일어나는 역사라는 것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세리 마태를 부르시고 그들과 함께 식사하시는 예수님을 못마땅해 하는 바리새인들을 향해서도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으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13절). 나의 잘못된 선입관이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제한하지는 않았는지 뒤돌아봅니다. 머리로만 아는 지식은 아무런 일도 일으키지 못한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사망과 질병이 실재인 것처럼 우리를 사망의 권세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도 실재입니다. 그리고 그 능력은 믿는 자만이 경험할 수 있는 은혜입니다.

오늘도 그 은혜의 힘을 맛보기를 원합니다. 그 은혜가 오늘을 사는 이유와 원동력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 은혜의 능력이 실재가 되는 이 땅의 나그네 여정 길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마라나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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